정호진의 ‘약속의 땅’을 읽고
오래 전에 읽었던 책 한권이 눈에 들어 왔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결코 재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독실한 기독교인이 볼 때에도 약간은 불경스러운 '약속의 땅'이란 젊은이를 위한 성서 이야기인데,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흥미로웠다.
역사이래로 가장 많이 팔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성서는 종교인들만이 읽는 경전 이전에 우리가 한 번쯤은 읽어 보고 싶은 책(?)일 것이다.
기독교인 보다 일반인에게 권하고 싶은 책
정호진의 약속의 땅은 우리가 성서를 제대로 읽고자 할 때, 혹은 성서가 지루하고 재미없을 때. 아니면 성서의 이야기가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생각 될 때, 그도 아니면 성서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큰 줄기만이라도 알고 싶을 때, 비기독교인 에게 먼저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내가 처음 성서를 읽었을 때의 기억은 솔직히 뭐, 이렇게 재미없는 책이 다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를, 낳았고, 낳고, 낳고, 또 낳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정말 지루했다. 그 뿐이라면 참고 읽을 수 있으련만, 현실에서 일어나기 불가능한, 보기에 따라서는 터무니없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의 전개는 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솔직히 재미없었다.
그런데 정호진의 ‘약속의 땅’을 읽고부터 성서가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던 성서의 이야기가 정호진의 ‘약속의 땅’에서는 맹목적인 믿음이나 동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웠다.
그러면 정호진의 ‘약속의 땅’은 비성서적 입장에서 쓰여 진 책일까? 또한, 나는 비기독교인 이고, 그래서 나 혼자 재미있게 읽은 것일까(?) 하지만 나는 크리스천이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신앙하는 사람이다. 사실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을 자처하면서 윤리적으로 혹은 기독교적으로 일반인보다도 못하게 사는 사람을 향하여, 어떤 신학자는 “독실한 크리스천보다 진지한 무신론자가 훨씬 더 예수와 가까이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내가 읽어 본 정호진의 ‘약속의 땅’은 그 어떤 책 보다 성서적 입장에 충실하고 또, 알기 쉽게 쓰여 졌다는 것이다. 구약성서를 관통하는 큰 줄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다.
성서를 읽는 이의 태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성서는 수천 년 전에 쓰여 졌다. 수천 년 전에 쓰여 진 성서의 이야기가 어떤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향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아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능한 한 성서를 제대로 읽고,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받아드리려는 것은, 성서를 읽는 이의 당연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성서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의 문제
그러나 일점, 일획도 성서에 쓰여 진 글은 오류가 없다는 식의 이른바,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일부 맹목적인 믿음과 자의적인 해석은 논외로 하더라도 성서해석에 있어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 또한,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사실상 저마다 상이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성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서해석과 관련하여 더 깊은 자기성찰이 요구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무오설’ 등, 성서 해석의 독점적 권리를 행사했던 중세시대의 사제들만이 아니라, 사실 모든 해석은 모든 시대에 특정 집단과 특정권력이 중요한 정책이나 국가적 중대 사안을 결정할 때,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독점적 권리를 행사해 왔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호진의 ‘약속의 땅’은 사회적인 약자의 관점에서
해석보다 당시의 상황과 입장에서 성서 읽기를 시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정호진의 ‘약속의 땅’은 ‘해석’보다 당시의 역사적 조건이나 상황을 현재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누가 보아도 성서 읽기가 재미있고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해석이 단순히 ‘글자’ 위주의 의미론적 해석에 머물었다면, 정호진의 그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가난한자, 늘 고통 받고, 억압받고, 굶주리는 자의 관점에서 성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죄론의 허와 실
기존의 전통적인 성서 해석은 신(하느님)과 인간의 수직적, 대립적 구도를 마치 의도적(?)으로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통적인 해석은 원죄 론에 대해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요컨대, 전통적인 해석은 에덴동산과 선악과의 실체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단지, 따 먹지 말라는 과일 하나를 따 먹었다고 수천 년 동안 그 죄가 모두에게 상속된다는 이른바 추상적 원죄 론을 통해 너무나 쉽게 ‘죄’의 일반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호진의 ‘약속의 땅’은 실제 있을 법한
구체적인 역사, 현실과 인과관계로부터 추론 한다.
하지만, 정호진의 ‘약속의 땅’에 따르면, 에덴동산은 성서에도 언급되어 있는바, 부족할 것이 없는, 모든 것이 풍족했다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고, 아담과 이브의 어떤(?) 선택과 결정이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선악과’로 인해 ‘죄’가 성립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아니고, 모든 것이 풍족한 상황이란 점과 그것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아담과 이브의 과실치사(?)로 인해 놀고먹던(?) 입장에서 결국, 땀을 흘려 노동하는 현장으로 쫓겨났다는 결말은 추상적인 원죄론 보다 매우 구체적인 혹은 급박하고 긴장된 상황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아담과 이브 이후로 사람들이 그들이 지었던 죄 가운데 있다는 구절 또한, 부족할 것이 없는, 모든 것이 풍족한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에 주목할 때, 알 수 없는 막연한 원죄(?)가 아니라, 물질에 대한 끝없는 인간의 욕망과 소유에 대해 경고한 것으로 보여 진다. 왜냐하면 물질에 대한 소유와, 풍족한 삶과 부자에 대한 욕망에 관한 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벨탑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에 대한 도전, 혹은 교만의 상징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원죄 론과 마찬가지로 불특정 인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방인의 신과 우상을 섬기고, 바벨탑을 실제로 쌓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보통의 평범한 혹은, 일반 서민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선진 외국의 문물과 사상(잡신)과 문화(우상)를 수입하고 그것을 자랑삼아 스펙으로 과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사람, 또 오늘날의 빌딩을 소유하고 가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 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통적인 해석에 기대어 성서를 읽을 때, ‘죄’에 따른 혹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그 책임은 항상 인간, 일반이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모든 시대에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현실에서는 똑같은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위에 군림했던 사람이 있다. 중세시대의 사제 계급이 그렇고, 산업화 이전의 군부독재 정권이 그렇고, 자본주의 사회의 막강한 자본 권력이 그렇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항상 ‘너희들과 다른 사람’이란 걸(특권의식) 보여 주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 곧, 자신들은 신(神)의 위치에 있는 특별한 사람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신과 우상을 섬기고, 바벨탑을 쌓아 하느님께 도전하는 자들은 권력을 가진 그들 자신이지만, 자신들의 잘못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모든 문제와 잘못은 자신들이 아닌, 결국 너희들(일반 대중도 잘한 게 없다, 곧 모두의 잘못이다.=양비론)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느님은 어정쩡한 중도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성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전통적인 해석과 달리, 추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헐벗고 굶주린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구체적으로 지칭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을 핍박하고 억압하는 세상의 권력과 부자에 대한 언급도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사람들을 질타할 때에도 두루뭉술한 표현 보다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사람에 대해 지적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고 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너희 부자들은 꿈도 꾸지마라, 너희들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절대로 들어 갈 수 없다는 선언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배고프고 헐벗고 정치, 사회경제적으로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 너희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명확하게 선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서의 정의는 전통적인 해석가들처럼 추상적이고 모호하지 않다. 예수의 안식일 법에 대한 선언도 마찬가지다. 법 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선언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그러므로 단순히 일반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 이전에 안식일은 왜 필요했을까? 또 공식적으로 일주일 중 하루는 쉬라고 법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실 안식일에 노동을 했다고 문제를 제기한 랍비는 일주일 중 하루가 아니라 매일 놀고먹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애시 당초 안식일은 일요일도 쉬지 못하고(강제노동 등) 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노동법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은 항상 사회적 약자를 편들었다.
이 같은 사실에 근거, 정호진의 ‘약속의 땅’은 추상적 인간 과 하느님의 구도가 아니라, 성서 전체적으로 하느님은 철저하게 부자와 빈자를 구분하고, 제국주의와 피지배자, 억압하는 자와 핍박당하는 자를 구분하여, 어정쩡한 중도가 아니라, 항상 일관되게 가난하고, 힘없고 빽 없는 약자의 편을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재미없었던 성서에 흥미를 가지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러니까, 하느님의 정의와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 무엇을(?) 막연히 맹목적으로 믿는 독실한(?) 새벽기도가 아니라, 정치, 사회경제적인 약자를 편들고 항상 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열망하고 실천하는 것, 이것이 내가 정호진의 ‘약속의 땅’을 읽고 느낀 감상이다.
끝으로 ‘하느님 나라’는 추상적인 유토피아, 개인적인 영달과 내세의 복을 구걸하는 부적과 같은 샤머니즘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 이후 무너진 평화(平和)를 회복하여 더 이상, 가난한 자와 부자로 양극화 되지 않는, 고통도 미움도 원망도 없는 그런 구체적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역사적 현장에서 실현하여야할 세상(새 하늘)과 사회(새 땅)이다.
정 호 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서 한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연세대 대학원, 한신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연세대, 서강대, 성공회대 등에서 10년간 성서학, 생명농업 등을 강의하였다.
거창과 합천에서 10년간 희망 없는 한국농촌에 희망을 불러일으키려고 직접 생명농업을 실천하며 마을공동체 활동 및 생명농업 실천 모임을 결성하고, 전국에서 100여 차례 ‘우리의학강좌’를 진행하였다.
국제NGO 생명누리(대표 정호진)를 창립하여 인도에서 10년간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는 불가촉천민들의 빈곤퇴치와 문맹퇴치 및 자립을 위한 생명농업 순회강좌, 지하수 개발 사업, 행복한 마을공동체 만들기, 에이즈 퇴치운동 및 에이즈 아동센타 운영 등을 하고 있다. 인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네팔, 중국, 라오스 등 아시아 여러 나라와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지구촌 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탈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구촌인디고청소년여행학교를 기획하고 운영하여 청소년들이 인도와 네팔 동남아 중국 등 가난한 농촌 마을들에서 국제적 사귐을 가지며 세계의 문제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하는 움직이는 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경북 문경에서 대안학교인 샨티학교(중/고 통합형 6년 과정)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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